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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혜지가 수집한 삶의 색

    일상을 살아갈 땐 영원히 알 수 없던 것들이 여행을 다녀와서야 선명해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행을 갈 때마다 늘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최혜지의 기록을 톺아보며, 제가 보았던 풍경들을 다시 복기하는 과정을 거치니 꼭 짧은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듭니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며 세계 속에 출렁이는 삶의 의지들을 느꼈습니다.

    제주의 동백나무 ⓒ최혜지


    우리는 여행마다 혹독한 선택의 순간을 거칩니다.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지만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내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복기하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선택지가 궁금해질 때면 ‘방명록'을 유심히 보곤 합니다. 그중에는 성실하게 여행기를 적어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행 도중 겪은 사사로운 일,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이 상세히 적힌 페이지를 넘기며 ‘이런 곳도 있었어?', ‘여기서 이런 생각을 했어?'하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내친김에 답장을 달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그 사람이 이곳으로 돌아와 자신의 일기 밑에 적힌 문장을 읽다 영감을 얻길 바라면서요.

    최혜지의 작품과 글, 사진을 보며 여행지에서 재미있는 방명록을 읽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는 한 사람의 관심사와 시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최대한 일상을 겪어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삶을 여행처럼 살고 싶어 하기도 했지요.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꺼이 그 속으로 뛰어들어보려는 의지. 이 모든 것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좌) 5월의 해운대 / (우) 여행 도중 마주친 물결 ⓒ오은재


    저는 여행지에서 타인을 잘 찍지 않는 편입니다. 대신 사진첩에 물결 사진만 한가득 쌓아 돌아옵니다. 어느 곳에서 마주친 파도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구도의 장면들뿐이죠. 물론 부산의 바다는 각각 구역마다 특색이 명확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송도에 가면 하늘 위에 케이블카들이 동그라니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영도는 해안 산책로를 따라 귀여운 상점들이 즐비하죠.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보면 광안리의 낭만이 절로 떠오르고요.

    부러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저와 달리, 최혜지는 수많은 타인을 만나기 위해 삶의 중심부로 파고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가 본 풍경과 그가 본 풍경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최혜지가 기록한 부산은 뭐랄까, 정말 빽빽했습니다.



    (좌) 부산 시장에서 발견한 그물들 / (우) 정겨운 시장 풍경 ⓒ최혜지


    # 수없이 많은 외부인이 물밀듯 들어와 정착했던 부산은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야기를 줍고 다시 이야기를 입히고, 색을 줍고 다시 색을 입힌다.
    집이 아닌 낯선 곳에 일상을 짓고 스펙터클 밖의 세상을 만난다. 표류한다.
    이제는 쉼의 형태이자 작품의 형식.
    나의 다음을 위한 가장 집중된 소비 중이다. _작가 노트 중


    예정된 기간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르게 된 부산에서, 그는 해변을 여유로이 거닐며 바다가 전해주는 감각을 느끼고 휴식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도 이야기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나섰습니다. 가장 자주 찾았던 곳은 다름 아닌 ‘시장'이었죠.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과 먹거리들이 가득한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골목 골목을 쏘다니다 보면 행인들을 뒤따라온 이야기들과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문득 인생 자체가 드라마처럼 느껴졌습니다. 최혜지를 사로잡은 건 그런 적나라한 삶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꾸미지 않은, 가장 보통의 일상을 발견한 순간 기록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렸지요.

    “사실 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그물을 꺼내고 이런 모습들에서 삶의 땀 냄새를 느끼거든요. 이게 실제로 보면 멋지지만 그림으로 옮겨졌을 때 아름답다고 느끼긴 참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이질적인 재료인 시멘트로 최대한 세련되게 풀어보려고 했어요.”



    (좌) 최혜지, 'Life' Buan. 2022 Mixed Acrylic on canvas , 72.7 x 53.0 cm , 2022 / (우) 빽빽한 부산 전경 ⓒ최혜지


    그의 시선을 경유하고 나니 얼마 전 다녀온 해운대를 조금 달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안로를 산책하는 동안, 5월임에도 벌써 웃통을 벗은 채 수영하고 소란스럽게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요. 이전까지 제게 해운대란 사람들이 넘치는 휴가지에 불과했습니다. 여름마다 해수욕장에 모여 야단법석을 떠는 사람들과 그들을 손님으로 끌어들이려는 현지인이 만들어 낸 풍경이 다소 부담스러웠거든요. 반면에 최혜지에게 부산이란 일상의 활기와 이야기가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사진과 그림 속에는 삶의 흔적들이 물결만큼이나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좌) 사진을 찍기 위해 새치기를 해야했던 인도의 타지마할 , 72.7 x 53.0 cm , 2022 / (우) 패턴처럼 보이는 인도 사람들 ⓒ최혜지


    #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에 색이 입혀진다면.
    정신없는 소리와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모두 색이 입혀진다면.
    이방인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에 색이 입혀진다면.
    인도는 내가 경험한 어떤 나라보다 색이 선명하고 짙다. _『인도색필터』 (2020, 에노스) 중 발췌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퍼지기 직전, 최혜지는 삶의 색을 수집하고자 인도로 떠났습니다. 인도는 그야말로 총천연색의 나라였습니다. 그곳에선 멈춰서서 고민하거나 알 수 없는 내일을 두려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도에 없는 곳을 충실히 헤매고, 처음 본 이와 사랑에 빠지고, 몸으로 체득한 감각과 쉴 새 없이 흘러드는 감정에 전념했지요.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그것들을 모조리 기록했습니다.



    최혜지, 'LIFE' square. india 2022,Mixed Acrylic on canvas , 100.0 x 65.1 cm , 2022


    처음 일상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후, 그는 일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와 도구를 만나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처음에 사용했던 물질은 파라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누군가의 삶을 그려내기엔 너무나도 무르고, 따뜻했지요. 생의 예리한 단면들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재료를 찾고자 몇 년간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 끝에 색이 잘 스며들고 무게감이 적당한 시멘트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에게 시멘트란, 삶을 은유하는 재료입니다. 시멘트는 차가운 현실들을 버텨내고 난 뒤에, 단단해지는 우리네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좌)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갠지스 강 ⓒ최혜지


    # 세상 어딘가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찾아가는 곳이 있대.
    거기서 죽으면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를 끊을 수 있다고 하나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평생 모은 장작 값을 챙겨 그곳 화장터 근처로 이사를 오기도 한 대. 그래서 그랬나봐.
    그곳의 색이 유독 더 생기로워보이더라고. _『인도색필터』 (2020, 에노스) 중 발췌


    어떤 날엔 갠지스강 앞에 앉아 시신을 처리하는 장면을 보기도 합니다. 현지인도 쉽게 출입할 수 없는 공간에서, 최혜지는 자신이 철저히 이방인임을 실감합니다. 그러다가도 친절한 누군가가 건네준 짜이를 들이키며 한 사람의 몸이 타오르는 것을 오래오래 지켜보았지요.
    삶과 죽음은 언제나 스위치를 누르듯, ‘달칵'하는 사이에 결정되곤 합니다. 자석의 양극단에 위치한 n극과 s극이 실은 제일 가까운 사이였던 것처럼, 그 둘은 언제나 서로에게 조금씩 의지한 채로 나란히 머물러있죠. 그가 묘사해낸 죽음의 풍경 속에서 잠깐의 달콤함을 느꼈던 순간에 대한 대목을 읽으며 어쩐지 다 산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성한 제주 풍경 ⓒ최혜지

    (좌) 최혜지, 'LIFE' jeju 2022, Mixed Acrylic on canvas , 72.7 x 53.0 cm, 2022 / (우) 겨울 바다로 산책나온 사람들 ⓒ최혜지


    작년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를 즐기는 선비마냥 멋진 경치나 보고 글이나 쓰기 위해서 택한 여행길이었죠. 정작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선 볼 수 없는 울창한 숲과 나무 군락들을 보고 온 뒤에도 펜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 한 달 내내 저는 제가 경험한 대자연의 위용에 대해 멋드러지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야 말았습니다. 언어는 늘 그렇게 자연 앞에서 지고야 맙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자연은 이길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사람들로 북적였던 인도와 부산에 비해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여백이 눈에 띄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그들을 둘러싼 외부의 환경들로 자연히 눈길을 돌리게 되곤 합니다.자연에 자리를 내어준 채 점처럼 찍혀있는 사람들을 보며, 최혜지의 주제가 조금 더 확장되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길가의 풀꽃 ⓒ최혜지


    아티스트 필름 촬영 차 장흥 스튜디오에서 최혜지를 만난 날, 그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그림은 자신에게 큰 힘을 주었던 사물이나 생물들을 기록하는 'Team' 시리즈 중 하나였죠. 주변에서 마주친 식물들을 콜라주 하듯 재배치 한 작품을 보며, 제가 놓치고 만 제주의 풍경들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꽃이나 식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저희보다 윗세대의 분들이었어요. 한동안 꽃 사진을 찍고, 일부러 부모님들의 말투를 쓰면서 어딘가에 업로드하는 것이 일종의 ‘밈'으로 통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식물을 보러 다니는 일이 젊은 사람들의 문화로 전유 되었다고 생각해요. 언제부터 자연이 힙한 이미지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작업을 하는 동안 고민을 해봤어요. 우리는 기후 변화를 정면으로 맞닥트린 세대잖아요.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자연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감지 한 것 같긴 해요. 기나긴 지구의 시간 속에서 , 가장 최후에 남은 인류들이 불안함을 느끼며 남은 자연들을 기록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최근 ‘인류세'에 대해 주목하고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최혜지의 멋진 해석을 들으며 눈앞에 놓인 캔버스를 보았습니다. 시멘트를 쌓아 올려 그려낸 앉은뱅이 풀들은 금방이라도 캔버스 너머로 자라날 것만 같았지요. 이토록 도시적인 재료로 자연이 지닌 힘을 표현할 수 있다니. 그 아이러니한 구석마저 그다운 선택이다 싶어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좌) 적막한 풍경 위 푸른 유빙 / (우) 국립공원에서 본 섬같은 빙하 ⓒ오은재


    “사실 파라핀이란 재료를 아직 놓은 건 아니에요. 그 소재를 이용해서 빙하를 표현해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최혜지는 지속해서 자연을 그릴 예정이라고 했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가 보았던 빙하들을 떠올렸습니다. 마침 우연하게도, 저도 팬데믹 직전에 아이슬란드를 다녀왔거든요. 그가 삶의 뜨거움을 느끼며 인도의 거리를 누비는 동안, 저는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설원이 펼쳐진 대자연을 둘러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보다 자연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훨씬 더 넓은 나라였기에 드넓은 산과 바다를 앞에 두고 설 일이 많았습니다. 그중 다이아몬드 비치는 정말이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

    해변 근처에는 바다에 떠밀려온 빙하들이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죠. 세공 직전의 원석처럼 아주 희고 불투명하거나 얼음처럼 투명한 빙하도 보았습니다. 그 앞에 선 가이드는 많은 기후학자가 향후 200년 이내에 모든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사라지리라고 예측한다는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국가적으로 빙하를 지키기 위해 환경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이야기하던 그는 챙겨온 텀블러를 꺼내 보라며 부추겼습니다. 그 안에 작은 빙하 조각을 담아주었죠. 흘러나온 물을 들이켰을 때, 몸속을 가득 채웠던 청명한 물맛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 설 때면 인간은 무력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혜지는 생태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충실히 담아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태까지 했던 작업에서 좀 더 나아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에게 귀를 기울이고 싶다고요. 그것밖에 자신은 달리할 길이 없다고요.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한 일회용품과 붓 대용으로 쓰는 나무젓가락들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 가방에 챙겼습니다. 그 사소한 실천으로부터 그의 다짐을 실감했죠. 우주먼지 같은 존재인 한 인간이 불러일으킨 바람이, 큰 태풍으로 작용할 순간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좌) 제주 바다 ⓒ최혜지 / (우) 제주 바다 ⓒ오은재


    일상을 살아갈 땐 영원히 알 수 없던 것들이 여행을 다녀와서야 선명해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행을 갈 때마다 늘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최혜지의 기록을 톺아보며, 제가 보았던 풍경들을 다시 복기하는 과정을 거치니 꼭 짧은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듭니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며 세계 속에 출렁이는 삶의 의지들을 느꼈습니다. 켜켜이 쌓아 올린 일상의 색을 보며,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진정으로 타인의 삶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달까요.

    아직 제주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만난다면, 그와 각자의 여행길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방식대로 삶을 느끼고, 표현하고,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길.

    "사실 저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괜찮은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잘살아 봅시다, 괜찮아요, 함께 해요.' 같은 번지르르 한 말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위로를 건네고 싶어요.”



    EDITOR 오은재 DESIGNER 이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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