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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미술관에서 만나, 유럽 뮤지엄 나잇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미술관의 특별한 밤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바젤 쿤스트뮤지엄,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스위스 건축 뮤지엄부터 로테르담 뮤지엄까지.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우연히 경험한 마법과도 같은 시간들을 공유합니다. 그럼 모두 자정의 미술관으로 떠나볼까요?

    바젤 쿤스트뮤지엄 벽면을 가득 메운 뮤지엄나잇 로고, 2024년 1월 19일에 진행되었다. ©museumsnachtbasel


    프랑스 국경에 맞대어 있는 스위스 바젤(Basel)은 익히 ‘아트 바젤’로 잘 알려진 예술의 도시입니다. 지난 여행 때 보지 못한 미술관과 건축물을 방문하기 위해 바젤에 도착했을 때, 저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체크인을 준비해 주던 호텔 직원은 조심스럽게 보라색 팜플렛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관심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주 특별한 밤이 될 거예요. 바젤에 있는 모든 문화예술 뮤지엄이 새벽 2시까지 문을 열어요.” 고민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요. 서둘러 뮤지엄 지도를 손에 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Bayeler Fondation, Basel ©전혜림


    해가 지면 꽁꽁 문을 닫아버리는 미술관에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까지 머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설레는데, ‘뮤지엄나잇’은 단순히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호텔에서 받은 팜플렛을 펼쳐보니 도시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이 문을 여는 것은 물론, 각자 오늘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간별로 짜두었더군요. 미술관 앞마당 밤 산책, 게임을 통해 작품과 가까워지기, 디제잉, 사진 남기기, 전시 참여 작가의 고향 전통 음식 체험 … 아무래도 이건 행사가 아니라 ‘축제’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Bayeler Fondation, Basel ©전혜림


    첫 번째 목적지는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입니다. 지난 프린트베이커리 바젤 미술 여행 기사에도 소개했던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은 렌조 피아노의 멋진 건물을 체험할 수 있는 동시에 매번 흥미로운 전시를 보여줍니다. 이날은 조지아의 국민 화가라 불리는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전시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미술관에 5시가 다되어 도착했지만 전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마감 시간이 새벽 2시니까요.


    Bayeler Fondation, Basel ©전혜림


    저는 느긋하게 전시를 보았지만 직원들은 미술관 곳곳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뮤지엄도 가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하는 프로그램들이 궁금해져서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며, 이 소중한 밤을 어찌 보내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데 저 멀리 창 너머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습니다. 이곳의 첫 행사는 야회 캠프파이어인가 봅니다.

    해가 지고, 붉은 낙조가 펼쳐지는 저녁 6시. 공식적인 ‘나잇’이 시작되었습니다. 불 앞으로 하나둘 사람이 모이고, DJ가 공연을 시작합니다. 무료로 나누어주는 스위스 전통 빵과 마시멜로를 기다란 꼬치에 끼워 불에 익혀 먹습니다. 뒤쪽 미술관 입구에는 밤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얼른 다른 뮤지엄의 분위기도 느껴보고 싶어서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Bayeler Fondation, Basel ©전혜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녁에 뮤지엄을 방문할까?’라는 궁금증은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에서 나오자마자 해결되었습니다. 시내로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던 중 사람을 가득 태운 버스 한 대가 도착했고 그 앞에는 ‘뮤지엄 셔틀버스’라는 이름이 보였습니다. 바젤 사람들, 예술에 정말 진심이네요. 시내로 가니 더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뮤지엄 입구마다 줄이 늘어져 있었거든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눈을 반짝이며 진지한 토론을 하는 할머니들, 자신들만의 축제인 양 맥주를 손에 들고 모여 있는 청년들. 모두 들뜬 마음으로 뮤지엄과 뮤지엄 사이를 바삐 걸어 다닙니다.


    오후 11시의 쿤스트할 바젤 ©전혜림


    도시는 늦은 밤까지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뜨겁습니다. 사진은 오후 11시가 넘은 시각의 쿤스트할 바젤(Kunsthalle Basel)의 모습입니다. 여기 또한 관람객으로 가득했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진심으로 전시를 감상 하기 위해 모인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더 많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전시를 보다가도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했던 것 같습니다.

    쿤스트할 바젤은 현대 미술관으로 동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양한 작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뮤지엄 나잇 날에 맞춰 새 전시를 오픈했습니다. 이 외에도 그날 밤 전시를 오픈하거나, 팝업 형태의 전시를 준비하거나, 프리 오프닝을 하는 등의 뮤지엄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 건축 뮤지엄, ‘WHAT IF’ 전시 전경 ©전혜림


    쿤스트할 건물과 같은 건물을 공유하는 스위스 건축 뮤지엄(S AM, Schweizerisches Architekturmuseum)에서는 ‘WHAT IF(만약에 이랬다면…)’을 제목으로 실행된 적이 없지만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언급되는 스위스 내 건축 프로젝트를 아카이빙한 전시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전시는 공모에 당선되지 못하거나, 당선됐으나 여러 문제로 완공되지 못하거나, 기약 없이 시공이 지연 중인 건물들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관련 기사, 원본 도면, 해당 프로젝트가 영감을 받은 책 등을 건축가의 책상 마냥 책상 위에 자료를 늘어놓는 설치였습니다.

    우리는 늘 완성된 건물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세계 다른 어느 국가보다 도시주의 실현과 건축에 열정적인 스위스이기 때문에 이런 전시도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실패’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건축 사무소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인정하고 대안적 상황을 위해 이를 조명하는 모습이 정말 재밌었고, 완성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로테르담 도시 전경 ©전혜림


    그저 여행을 위해 도시를 방문한 날이 뮤지엄나잇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한 번도 신기한데 저는 이걸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3월에 방문한 네덜란드 로테르담, 고작 하루 머무는 데 그 날이 뮤지엄나잇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걷다가 재밌어 보여 들어간 미술관의 직원이 “우리 30분 후에 문 닫아. 근데 2시간 후인 오후 8시부터 뮤지엄 나잇이 시작되니까 그때 다시 와!”라는 말을 듣게 되었죠. 급히 ’early bird’ 티켓이 아닌 ‘late bird’ 티켓을 구매하고는 8시까지 도시를 배회하며 행사 시작을 기다렸습니다.


    뮤지엄 길(museum boulevard)의 모습.거리 곳곳을 채운 예술 공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뮤지엄 나잇을 즐기는 사람들 ©전혜림


    로테르담 뮤지엄 나잇은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 로테르담은 꽤 작은 도시라서 하루면 여유롭게 다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뮤지엄나잇 지도를 보니 생각보다 정말 많은 미술관이 존재하는 문화예술의 도시였습니다. 대안공간부터 갤러리, 대형 뮤지엄까지 무려 35개가 넘은 문화적 장소에서 행사가 열렸습니다. OMA가 설계한 ‘쿤스트할 로테르담(Kunsthal Rotterdam)’밖에 볼 게 없을 줄 알았던 이곳에 이렇게나 많은 볼거리가 있었다니. 뮤지엄 나잇이 아니었다면 이런 정보도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이틀뿐이니, 새벽 한 시까지 로테르담 뮤지엄을 제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작품 앞에서의 공연 ©전혜림


    이곳은 동시대 문화 예술을 다루는 멜리 예술재단(Kunstinstituut Melly)입니다. 뮤지엄나잇의 테마를 ‘음악’으로 잡았죠. 1층부터 3층까지 각 층별로 다른 전시를 하고 있던 이 미술관은 공연도 층마다 다르게 기획하여 진행했습니다. 같은 시간, 0층의 분리된 두 공간 중 한 곳은 자연주의 음악이, 다른 한 곳은 테크노가, 1층에서는 재즈가 울려 퍼졌습니다. 작품을 등지는 동시에 맞은편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음악에 심취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꼭 좌석에 앉지 않더라도 공연을 하지 않는 쪽에서 작품을 보면서 귀로만 노래를 듣는 사람도 있었죠.


    로테르담 뮤지엄 나잇 ©전혜림


    작품 앞에서 공연하는 곳도 있지만, 전시장 엘리베이터에서 공연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바로 데폿(Depot Boijmans Van Beuningen)입니다. 네덜란드 미술 여행 기사에서 소개된 뮤지엄이기도 하죠.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 수장고는 세계 최초의 개방형 예술 수장고입니다. 작품을 어떻게 보존, 보관하는지, 어떤 경로로 작품이 세계를 여행하는지 등 미술 전시 이면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소개하는 곳이죠.


    로테르담 뮤지엄 나잇 ©전혜림


    이곳에서는 기존 수장고 작품을 관람하는 것뿐만 아니라 뮤지엄 나잇을 위한 특별한 참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오브제 가족(Family of Objects)’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 컬렉션을 하나의 대가족이라고 상상하고 그들 사이에 관계를 상상하고 추측하는 이벤트였습니다. 작품에 이름을 붙이고, 두 작품(인물)사이에 갈등이 있는 상황을 만든 후 관객이 제 3자가 되어 컬렉션 중 하나의 작품을 이용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서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커다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는 상황이 정말 귀엽지 않나요.

    또, 네덜란드 유명 사진가 쿠스 브뢰켈(Koos Breukel)은 직접 미술관에 와서 무려 다섯시간 동안 200명 가까이 되는 관객을 촬영하고 그들에게 사진을 프린트해서 주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잠을 자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수장고’라는, 정적일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이렇게 활기찬 관객의 문화적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이 묘하고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뮤지엄나잇이란 문화 예술 공간에 더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밤인가 봅니다.


    로테르담 뮤지엄 나잇 포스터, 2024년 3월 2일에 진행되었다. ©museumnacht010


    두 도시에서 경험한 뮤지엄 나잇은 단순히 밤늦게까지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그 도시가 예술을 얼마나 가까이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유럽에는 바젤, 로테르담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시에서 ‘뮤지엄나잇’을 개최합니다. 일정은 각 도시마다 다르며 단언컨대 분위기 또한 모두 다르겠죠. 정말 우연히, 아주 운이 좋게 두 도시에서 이 행사를 만나게 되었지만 이제는 유럽 여행을 고려할 때 뮤지엄 나잇 일정을 찾아보고 방문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로 유명한 다른 도시는 또 어떻게 뮤지엄 나잇을 꾸리고, 즐기는지 알아보고 싶거든요.

    동시에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뮤지엄 나잇이 개최될 그날을 꿈꿔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매년 진행 중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은 문화 같습니다.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서울에서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집을 나서서 즐기게 될까요? 우리나라의 뮤지엄은 어떤 프로그램을 꾸리게 될까요? 어느 도시든, 한국에서 대대적인 뮤지엄 나잇을 즐기는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P.S 유럽 내 뮤지엄 나잇 일정을 정리해 둔 사이트를 공유합니다.
    만약 2025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추후 구글 검색창에 ‘museum night in europe’을 쳐보시기를! : 유럽 뮤지엄 나잇 일정





    WRITER 전혜림 EDITOR 조희연 DESIGNER 디자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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