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에 봄이 온 것일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몸을 에는 듯한 찬 공기에 코트 깃을 급히 여몄던 것 같은데, 불과 몇 주 만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여기저기서 꽃 축제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지만, 갑자기 우리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계절의 변화가 거짓말 같기만 합니다. 이럴 때면 꼭 시간은 흐르는데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Black neon' 전시장 전경 ⓒprintbakery
목탄 선 언저리에 달무리처럼 은은하게 퍼진 잔상과 꽃이 피어나는 방향을 따라 점점이 흩어지는 노란 빛. 청신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줄곧 어둡게만 느껴졌던 풍경의 틈으로 여러 가지 색이 스며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제야 우리도 모르는 새에 봄은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고야 말았습니다.
겨울밤을 가르고 봄볕이 태어나듯, 청신의 전시는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계절이 바뀌길 기다렸던 것일까요. 한창 봄기운이 움틀 때쯤 열렸던 전시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함께 지난 전시장 풍경을 둘러볼까요?
'Black neon' 전시장 전경 ⓒprintbakery
청신 작가가 그린 작품 속 오브제는 여타의 작품들처럼 관람객들이 다가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보다는 당장이라도 캔버스 밖을 뛰쳐나와 사람들을 맞이할 것만 같습니다. ‘정물화’는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적인 물건을 안정적으로 배치하여 구도를 잡은 후 그린 회화를 말합니다. 정물화 하면 흔히 떠오르는 정적인 그림들과 달리, ‘청신 표 정물화’는 약동감이 느껴집니다. 청신 작가는 원근과 명암, 색채 등을 통해 대상을 얼마나 치밀하게 묘사하고 재현하느냐에 치중하지 않고 작가 본인의 심상을 표현하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그로 인해 관람객들은 프레임 너머로 다가오는 감각들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죠.
'Black neon' 전시장 전경 ⓒprintbakery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바나나 작품 ⓒ청신
그의 그림 속 가장 눈에 띄는 사물은 단연코 레몬일 테죠. 노란 과일은 청신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합니다. 청신 작가가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선보인 노란 과일은 바나나입니다. 어느 날 바닥에 널브러진 노란 껍질을 보다가 본인의 모습을 마주한 작가는 그 이후 계속해서 바나나를 소재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겉으로는 마냥 달콤해 보여도 막상 속을 살펴보면 잔뜩 뭉그러진 우리들. 상처 가득한 현대인들의 초상을 목탄과 색의 대비를 이용하여 한 편의 블랙 코미디처럼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누군가에게 바나나는 그저 먹음직스러운 과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청신 작가는 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한 뒤, 내막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발견했습니다. 그에 자신의 사유를 접목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바나나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Black neon' 전시장 전경 ⓒprintbakery
캔버스 이곳저곳 배치된 레몬은 그림에 맛을 더합니다. 쨍한 형광으로 물든 열매를 보면 절로 입안에 군침이 돌고, 침샘이 뻐근해져 옵니다. 청신 작가는 레몬을 이용해 현실을 은유하는 것을 넘어, 우리에게 생생한 감각을 선사합니다. 과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번진 목탄 자국으로 인해 거무스름 해 보이는 껍질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묘사는 둥근 과일이 쉴 새 없이 굴러다녔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가만히 정지해있는 줄로만 알았던 레몬이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었듯, 어쩌면 우리 또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빛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청신 작가의 그림에는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 내재된 본연의 리듬을 눈치채고 긍정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Black neon' 전시장 전경 ⓒprintbakery
노랑과 검정은 가장 거리가 먼 색 같지만, 서로 밝혀준다는 점에서 좋은 짝꿍이기도 합니다. 계절 중 겨울과 봄이 맞닿아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겠죠. 깊은 겨울밤, 침묵에 잠긴 작업실에서 따스한 풍경을 상상하며 캔버스 위로 봄을 불러왔을 청신 작가. 그 모습을 그려보며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내부에 나긋하게 울려 퍼지는 목탄 소리가 꼭 안온한 계절의 기척처럼 들렸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선에는 다정함이 수반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청신한 노란색과 그 위를 유영하는 검은 선은 따스한 시간을 기다리느라 지쳤던 우리에게 이젠 봄을 함께 바라보자고 손을 건넸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면, 봄은 늘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맙니다. 그러니 짧은 계절이 흘러가기 전에 우리 모두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어디로든 데구르르 굴러다닐 수 있기를. 그렇게 생동하는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길 바랍니다.
'Black neon' 전시장 전경 ⓒprintbakery
EDITOR 오은재 인턴 DESIGNER 이진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