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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의 물결, 햇볕과 단풍, 자연의 색, 그리고 박서보

2021.9.28

유채꽃의 물결, 햇볕과 단풍, 자연의 색, 그리고 박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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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신작 에디션 프로젝트를 위해 연희동에 위치한 작업실 기지를 방문했습니다. 완성된 에디션을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는 데 손 군데군데 물감을 묻힌 박서보 화백이 나타났습니다. 작업 중 물감을 칠해 놓고 말리기 위해 기다리는 짧은 시간을 내어 급하게 내려왔다고 합니다. 박서보 화백이 직접 말하는 색채의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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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작업실 '기지'의 모습


“내가 지금 물감을 칠해 놓고 잠깐 온 거란 말이야. 나는 지금도 작업뿐이야. 매일, 하루 종일, 서서 그림을 그리거든. 저녁이 되면 다리가 뻐쩍다리가 된 것 같이 힘들어. 그래도 계속 그려야만 해. 그림은 나를 비우기 위한 거니까.”



박서보 작업실 '기지'의 모습


박서보 신작 에디션 프로젝트를 위해 연희동에 위치한 작업실 기지를 방문했습니다. 완성된 에디션을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는 데 손 군데군데 물감을 묻힌 박서보 화백이 나타났습니다. 작업 중 물감을 칠해 놓고 말리기 위해 기다리는 짧은 시간을 내어 급하게 내려왔다고 합니다. 세월의 무게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움직이지만, 맑게 빛나는 초롱한 눈동자에서 아직도 타오르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에디션 여섯 작품을 보여드리니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봅니다. 물감이 묻은 거친 손으로 에디션 작품 표면을 만지며 재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 이내 ‘세계 어디에다 내어놔도 인정받을 수준’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서보미술문화재단의 수준 높은 기술력과 프린트베이커리의 전문적인 기획력이 함께 선보이는 신작 에디션은 이렇게 박서보 화백의 꼼꼼한 검수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작 에디션 작품을 살펴보는 박서보 화백


주의 깊게 작품들을 보던 화백이 갑자기 유채꽃 이야기를 합니다. “제주도에 내 집이 하나 있어. 봄에 가면 유채꽃이 거의 바다 물결치듯이 밀려오거든. 그걸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아. 그래, 저런 것을 한 번 그려보자 싶어지지.” 제주도의 유채꽃이 담긴 작품이라니 괜히 남쪽 섬의 봄바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후에 화백의 작업노트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노란 작품은 꽃만 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채꽃이 너무 예뻐 아내에게 제일 예쁜 꽃을 골라 웃어보라고 했는데, 아내가 부끄러워하더니 하나를 골라 옆에 서 밝게 웃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미소가 유채꽃보다 더 노랗게 빛이 나서 그 미소를 작품에 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노란색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작 에디션, 좌측부터 Ecriture 161217_2016, Ecriture 130119_2013, Ecriture 080326_2008


박서보의 후기 묘법 작품은 직선적 구도와 두꺼운 마띠에르, 화려한 색감이 특징입니다. 자연의 풍경에서 얻은 이미지를 선과, 색,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번 신작 에디션은 3점의 후기 묘법이 포함되어 있어 화백이 느낀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빨간색은 색채 묘법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빨간 그림은 그냥 빨간 그림이 아니야. 일본 동경화랑에서 2000년에 개인전을 하게 됐거든. 원래 4, 5년에 한 번씩 하던걸 내 칠순에 맞추어 2년 만에 여는 것으로 기획을 했대. 나는 다 괜찮으니 단풍이 절정일 때 열어달라고 했어. 단 하나 바라는 것이라고. 천문대에 알아보면 언제가 절정기인지 나오지 꼭 그때 맞춰달라고 했지. 가보니 정말 단풍의 절정이더라고. 비가 오면 바로 떨어질 상태였어. 그때 후쿠시마의 방발산에 갔는데, 단풍이 가득한 골짜기를 보는 순간 으악 소리가 났어. 새빨간 골짜기가 나를 향해서 태워 죽일 것처럼 쳐들어오는 느낌인 거야. 아, 자연이 정말 위대하구나. 이런 충격을 계속 그려야겠다.”

“다음날에는 화산이 폭발되었다는 호수에 갔어. 다 도는 데 세 시간이 걸리더라고. 그런데 날씨가 너무 좋은 거야. 햇볕 방향에 따라 단풍이 다 다른 색으로 반짝였지. 정면으로 햇빛을 받을 때는 형광 빨강을 칠해놓은 것 같았는데, 바람에 흔들려 그늘이 지면 거무튀튀한 붉은색이 나오더라고. 이 자연의 변화의 조화를 봐 봐. 나는 이런 감흥을 그려. 이 세상에 빨간 그림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은 없어.”



신작 에디션 Ecriture 3-78_1978


달항아리 백자가 놓인 박서보 작업실


마치 눈 앞에서 단풍의 감흥을 음미하듯 천천히 말을 잇던 화백의 눈이 묘법 초기 작품에 닿았습니다. 이런 회백색은 어떤 연유로 나오게 되었는지 넌지시 여쭈었습니다.

“백자에 심취되어 있을 때가 있어.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이조 백자나 접시 사발 사다 놓은 것을 봤거든. 밤에 불을 켜고 보는데 사발 속에 마치 물이 담겨있는 느낌이 드는 거야. 빛을 받은 퍼런 색에서 정결함, 순결함을 느꼈지. 그런 색을 표현하고 싶어서 회백색, 유백색, 우윳빛을 많이 사용했었어.”

회백색의 화면에 긁듯이 그려진 연필 드로잉이 묘법의 시작입니다. 물감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 연필로 선을 반복하여 그리는 것은 목적이 없는 순수한 행위입니다. 행위의 기록만 남은 화면을 통해 우리는 화백이 쌓은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화백은 ‘묘법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표현하기보다 그것을 감춤으로써 한 단계 승화된 미의식에 도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수양과도 같이 반복되는 작업은 보는 이들에게 명상을 통한 치유의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박서보 작업실 '기지'의 모습


한참 에디션 작품을 보던 박서보 화백은 “이제 나 그림 그리러 다시 가도 되지?”라고 말하며 어린아이처럼 웃었습니다. 90년이 넘는 세월을 겪으며 많이 작아진 몸집이지만 작업을 하러 가는 뒷모습만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났습니다.



EDITOR 진혜민  DESIGNER 송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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