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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이미지 너머의 이야기

2022.02.11

바우하우스, 이미지 너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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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Bauhaus)’를 생각하면 각자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씩을 띄우게 됩니다. 하나의 단어보다 어렴풋한 이미지 정도입니다.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뜻이겠죠.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존립했던 바우하우스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 너머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요?
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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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디자인 박물관 ⓒ전혜림


‘바우하우스(Bauhaus)’를 생각하면 각자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씩을 띄우게 됩니다. 하나의 단어보다 어렴풋한 이미지 정도입니다.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뜻이겠죠.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의 시간 동안 조형예술 학교 바우하우스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좌충우돌 바우하우스 살아남기"라 제목 붙여도 될 만큼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복잡합니다. 1차 세계대전의 끝과 나치의 시작을 관통하면서 바우하우스의 교장은 세 번 바뀌었고 학교의 위치도 세 번 옮겼습니다. 급격히 발전한 산업화, 공업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각각 짙은 색을 가졌던 세 명의 교장의 임기에 따른 변화를 따라가면 이 복잡한 바우하우스 이야기를 안부터 바깥까지 살필 수 있습니다.



바우하우스 학교 도시 이전과 역대 교장 연표


Walter Gropius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창립되었습니다. 창립자이자 1대 교장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입니다. 1919년 바우하우스 창립선언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공예가와 미술가 사이에 가로놓은 높다란 방벽을 만드는 계급 차별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집단을 만들자. 우리 다 함께 건축과 조각과 회화를 하나의 통일 속에 포용하고 (...) 새로운 미래의 건축을 희구하고 상상하며 창조하자."

선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의 시작은 순수미술(회화, 조각)과 응용미술(건축, 공예, 디자인)을 건축을 중심으로 통합하여 '총체적 예술'을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우하우스 교육자로 활동했던 칸딘스키의 회갑 전시회 포스터 ⓒprint bakery


그로피우스는 화가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미술 이념을 제공하면, 공예가는 그것을 응용해 실질적인 생활용품을 만들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바우하우스 교육과정은 형태, 색채, 재료에 관한 기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6개월의 예비과정과 3년의 공방 교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교육은 현대 대부분의 미술 대학 커리큘럼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조형예술교육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죠.



바우하우스 교육자로 활동했던 파울 클레의 작품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상호 교류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로피우스는 다양한 분야의 교수진을 임용했습니다. 순수 예술가이자 모더니즘 예술가인 요하네스 이텐, 파울 클레, 바실리 칸단스키는 바우하우스 형태 교육자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방 교육에 관심이 없었고, 공방 교육자인 공예가들은 순수 예술가들의 교육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우하우스에는 항상 선생 간의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피우스의 교장 시절은 첩첩산중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들의 갈등뿐만 아니라 학교의 부실한 재정,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그를 마구 죄었습니다. 학교가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산업 시설이 거의 없고 귀족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탓에, 새로운 사상을 펼치려는 바우하우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로피우스는 1926년 바이마르를 떠나 산업이 발달한 도시, 데사우에 가게 됩니다.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포스터,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 전경 ⓒprint bakery


당시에 건축가로서의 명성도 대단했던 그로피우스는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Dessau Bauhaus, 1926)을 직접 설계하였습니다. 이 건물이 바로 우리가 가장 흔하게 알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건물이자, 모더니즘 건축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건물입니다. 포스터는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포스터 속 건물의 바깥벽은 전면부터 코너까지 유리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그로피우스의 파우스 공장(Fagus Factory,1913)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지금은 바깥벽이 전부 유리로 된 건물을 쉽게 볼 수 있지만 1900년대 초에는 상상조차 어려웠습니다. 특히 모퉁이까지 유리로 처리한 것은 더욱 혁명적인 디자인이었습니다. 덕분에 바깥에서 바라보면 건물이 가볍고 개방되어 보입니다. 바깥으로 더 뻗어나갈 것 같은 확장성까지 느껴집니다.



Hannes Meyer


그로피우스는 데사우로 학교를 옮겨와 얼마 되지 않은 1928년 1월, 사임을 표합니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선생과 좌우익의 끊임없는 공격에 지쳤던 것이죠. 그는 다음 교장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짙었던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를 임명합니다.

마이어가 교장이 되면서 바우하우스는 점점 기계주의로 향해갑니다. '바우하우스'를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이 기능주의 디자인을 말합니다. 그로피우스가 수공예에 주목하며 공업화의 여지를 넓히고 기능주의 색채가 나타난 것은 맞지만 이 시기부터 그런 인상이 짙어졌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것은 기능 x 경제라는 공식의 산물이다.”, “모든 생활은 기능이며 따라서 비예술적이므로 건축은 생물학적 현상이지 미적 과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마이어는 미적인 것보다 기능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공업화와 사회화에 푹 빠진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마이어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학교를 이끌었습니다. 선생들과 갈등은 물론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바우하우스를 위험하게 만들다가 결국 반대 세력에 의해 3년 만에 퇴출 당합니다.



Mies Van Der Roche


1930년 마지막 교장으로 부임한 미스 반 데 로에는 돈 많은 건축주를 위해 비싸고 고급진 재료로 집을 짓고 가구를 제작하는 건축가였습니다. "Less is More"를 외쳤던 그는 간결함의 아름다움을 지향했습니다.



Bercelona Pavillon ,Mies Van Des Roche ⓒ전혜림


미스 반 데 로에 재임 시절은 독일에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고전주의를 추구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국제주의적인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 미학을 반독일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우하우스는 나치로부터 퇴폐주의 미술 기관으로 낙인찍힙니다. 결국 1931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자 그들은 바우하우스를 공격했고 1년 뒤 학교를 폐쇄시킵니다. 미스 반 데 로에는 바우하우스를 살리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서 버려진 건물을 임대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총통이 되고 결국 바우하우스는 폐교되고 맙니다.



Bercelona Pavillon ,Mies Van Des Roche ⓒ전혜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4년이라는 시간을, 바우하우스는 ‘견뎌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우하우스의 모든 역사를 자세히 훑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어려운 과정 속에서 새로움을 일구어 냈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이곳에 모여 새로운 예술과 디자인을 위해 학생을 가르치고, 도전했습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디자인 박물관 ⓒ전혜림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바우하우스는 예술 분야와 미술교육에서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2019년에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바우하우스의 100주년을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바우하우스’가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 역사 안에 숨어있습니다. 긴 시간을 넘어 뒤돌아보면 바우하우스는 각자가 목소리를 내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단단해져 무언가를 창조해냈던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디자인의 모습은 이 과정에서 뻗어나간 곁가지입니다. 바우하우스는 타이포, 가구, 건축 등 수많은 곁가지로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미지도 곁가지의 일부겠죠. 곁가지 아래에는 기나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브제나 키워드를 나열해서 만든 바우하우스의 이미지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늘 빠져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들의 역사 속에서 알 수 있는 이념과 성과가 바로 그것이겠죠. 무언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바우하우스의 큰 흐름을 읽어냈으니, 곁가지가 어디서 뻗어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바우하우스 시절에 나왔거나, 그것과 관련된 작품들을 마주친다면 좀 더 깊게 다가가볼 수 있을 겁니다.




EDITOR 전혜림  DESIGNER 이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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